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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규·김기종 효자 정려비 및 정판 공식 관광정보
임실의 효충서원 안에는 김복규, 김기종 부자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가 있다.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세우는 비이다. 효충서원 경내에는 김복규, 김기종 부자의 정려비 2기가 서 있고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조선 철종 6년(1885)에 세운 것으로, 이조참판 서유훈이 왕의 명을 받들어 건립하였다.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한 이로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꿈에 나타난 도사가 일러준 대로 약을 구해 아버지께 다려드리니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효행을 듣고 나라에서는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의 아들 기종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효가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을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며 애통해하였다. 그때의 울음소리가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호동[虎洞]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앞면에는 각각 비의 제목을 세로로 새겼는데,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이다.
이 사진들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사진들을 가져온 사진입니다 (1장).
출처 · 한국관광공사
촬영자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 사진입니다.

확인된 정보
국가유산청 · 2025.09 기준- 지정일
- 1993.08.31
- 시대
- 1885년
- 지정 종목
- 시도유형문화유산
- 유산 소개
-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은 김해김씨 김복규(金福圭)와 아들 김기종(金箕鍾)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55년(철종 6)에 세운 것이다. 당초 전주시 삼천동 상거마을에 세웠던 것이 1981년 전주 도시계획에 따라 삼천동이 아파트단지로 조성됨에 따라 이곳 임실읍 정월리로 이전하였다. 정효각 안에는 효자 김복규 정려비와 효자 김기종 정려비 2기와 정려각 편액에는 안팎으로 효덕연경당(孝德衍慶堂),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이라 새겨있다. 모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다. 김기종의 장남 김영곤(金永坤, 1813∼1877)의 비문에 따르면, ‘유언에 따라 완옹(阮翁)에게 비명을 부탁하였다. 완옹의 글은 매우 간결하고 엄숙했다.’라고 적고 있다. 효자 김복규(金福奎, 1742∼1819)는 효성이 지극하여 16세 때 부친상을 당하기까지 온갖 효를 다하였으며 어느 도사의 감명을 받아 운명 직전의 부친을 여러 차례에 회생시켰으며, 그의 아들 김기종(金箕鍾, 1783∼1850)도 부친의 효심을 이어받아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그 애통한 울음소리가 호랑이 울음처럼 산수에 메아리쳐 마을 이름을 「호동(虎洞)」이라 바꾸어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기종은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펴낸 것으로 알려진 <진묵대사유적고>(1852)의 서문을 썼는데, 당시 유가로서 진묵대사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대사의 행적을 수집하고 간행하는데 힘썼다.
- 수량
- 2기
- 전화
- 063-640-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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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 임실군 · 관광지
김복규·김기종 효자 정려비 및 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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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진확인된 정보
국가유산청 · 2025.09 기준- 지정일
- 1993.08.31
- 시대
- 1885년
- 지정 종목
- 시도유형문화유산
- 유산 소개
-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은 김해김씨 김복규(金福圭)와 아들 김기종(金箕鍾)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55년(철종 6)에 세운 것이다. 당초 전주시 삼천동 상거마을에 세웠던 것이 1981년 전주 도시계획에 따라 삼천동이 아파트단지로 조성됨에 따라 이곳 임실읍 정월리로 이전하였다. 정효각 안에는 효자 김복규 정려비와 효자 김기종 정려비 2기와 정려각 편액에는 안팎으로 효덕연경당(孝德衍慶堂),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이라 새겨있다. 모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다. 김기종의 장남 김영곤(金永坤, 1813∼1877)의 비문에 따르면, ‘유언에 따라 완옹(阮翁)에게 비명을 부탁하였다. 완옹의 글은 매우 간결하고 엄숙했다.’라고 적고 있다. 효자 김복규(金福奎, 1742∼1819)는 효성이 지극하여 16세 때 부친상을 당하기까지 온갖 효를 다하였으며 어느 도사의 감명을 받아 운명 직전의 부친을 여러 차례에 회생시켰으며, 그의 아들 김기종(金箕鍾, 1783∼1850)도 부친의 효심을 이어받아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그 애통한 울음소리가 호랑이 울음처럼 산수에 메아리쳐 마을 이름을 「호동(虎洞)」이라 바꾸어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기종은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펴낸 것으로 알려진 <진묵대사유적고>(1852)의 서문을 썼는데, 당시 유가로서 진묵대사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대사의 행적을 수집하고 간행하는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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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기
- 전화
- 063-640-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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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효충서원 안에는 김복규, 김기종 부자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가 있다.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세우는 비이다. 효충서원 경내에는 김복규, 김기종 부자의 정려비 2기가 서 있고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조선 철종 6년(1885)에 세운 것으로, 이조참판 서유훈이 왕의 명을 받들어 건립하였다.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한 이로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꿈에 나타난 도사가 일러준 대로 약을 구해 아버지께 다려드리니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효행을 듣고 나라에서는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의 아들 기종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효가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을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며 애통해하였다. 그때의 울음소리가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호동[虎洞]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앞면에는 각각 비의 제목을 세로로 새겼는데,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이다.
이 사진들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사진들을 가져온 사진입니다 (1장).
출처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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