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묘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37.1355, 127.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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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묘 공식 관광정보

관광지 양식 · contentTypeId 12갱신 2026.06.09 · VisitKorea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관광공사 공식사진 ·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선조의 14명 아들 중 유일하게 정비인 인목왕후가 낳은 아들로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영창대군의 묘이다. 유영경 등 소북파의 지지로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대신에 세자에 책봉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 등 대북파에 의해 왕위에 위협을 주는 인물로 미움을 받았다.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들로 하여금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 진술케 하였다. 이 결과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강화부사가 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였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 왕실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별되는데 묘란 일반적인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왕의 자손이나 후궁,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 등의 무덤을 뜻한다. 영창대군 묘소는 원래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에 있었는데 성남시 개발계획에 따라 1971년 8월에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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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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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묘
🏛 한국관광공사 (KTO) 인증 정보

확인된 정보

한국관광공사 · 2025.06 기준
휴무
연중무휴
지정일
1983.09.19
지정 종목
시도기념물
유산 소개
영창 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 1606~1614)는 선조(宣祖)의 유일한 대군이다. 모후는 인목 왕후(仁穆王后)이다. 영창 대군은 선조의 사랑을 받았으나 어려서 선조가 승하했으며, 소북파(小北派) 유영경(柳永慶) 등이 지지했다. 광해군(光海君)과 이이첨(李爾瞻) 등은 이들을 미워하여 ‘7서(庶)의 옥(獄)’이라는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 옥사는 유영경 등이 영창 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며, 인목왕후의 부친 김제남(金悌男)도 관계되었다며 많은 사람을 처형한 무옥(誣獄; 억울한 옥사)이었다. 이로 인해 영창 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 울타리를 둘러 유배함)되었고, 9살의 나이로 강화부사 정항(鄭沆)에게 살해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영창 대군은 복권되고, 예에 맞게 안장(安葬)되었다. 봉분은 현대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그 앞에 묘표, 혼유석, 석상, 향로석을 놓고 좌우에 동자석(童子石)과 문인석, 망주석을 설치했다. 묘표는 이수방부(螭首方趺; 용이 조각된 비신 머리와 네모난 비좌)형태이며, 이수는 앞뒤로 여의주(如意珠)를 쥐고 있는 용을 한 마리씩 조각했다. 석상(石床)은 아래에 고석(鼓石)으로 받치고 있으며, 4각의 향로석(香爐石)은 매우 특별한 형태이다. 봉분 옆의 신도비는 1990년에 건립되었다. 영창대군 묘 석물들은 17세기 전반 왕실 묘소 석물의 기준작이 되는 우수한 작품이다.
수량
1기
영업시간
상시 개방
유모차
없음
전화
안성시 문화관광과 031-678-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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