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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 유허비 공식 관광정보


+18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정암 조광조 선생이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능성에 귀양을 와 사약을 받았던 곳으로, 조광조 선생을 추모코자 세운 것이 적려유허비이다. 적려란 유배되어 간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 두는 비를 말한다. 이 적려유허비는 능성현 당시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만 갖추었고 귀부도 형상만 다듬었다.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자취를 기록한 비문은 의정부 우찬 겸 성균관제주세자이사 송시열이 짓고 전서는 충청도 관찰사 겸 수군절도사 순찰사 민유중이, 글씨는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썼으며 현종 8년(1667년) 4월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건립하였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유배하러 와서 살았던 초가집이 함께 있다.
- ✓ 주차
이 사진들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사진들을 가져온 사진입니다 (21장).
출처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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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된 정보
한국관광공사 · 2026.05 기준- 휴무
- 연중무휴
- 지정일
- 1979.08.03
- 지정 종목
- 시도기념물
- 유산 소개
-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옛 자취를 기록해 두고 있다. 조광조(1482∼1519) 선생의 호는 정암으로, 중종 10년(151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14년(1519)에는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를 당해 이곳 능주 지방으로 유배되었으며, 그해 12월 20일에 사약을 받았다. 그는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 선조 대에 와서야 영의정에 추증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훗날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곳곳에 사당이 마련되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이다. 비몸에는 앞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는 글씨를 2줄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선생의 유배내력을 적었다. 머릿돌은 반달 모양으로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키어 있고 뒷면에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를 제작한 시기는 현종 8년(1667) 4월로, 당시 능주목사를 지내던 민여조가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 수량
- 1기
- 영업시간
- 09:00~18:00
- 주차
- 가능
- 전화
- 화순군청 문화예술과 061-379-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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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 화순군 · 관광지
화순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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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 2026.05 기준- 휴무
- 연중무휴
- 지정일
- 1979.08.03
- 지정 종목
- 시도기념물
- 유산 소개
-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옛 자취를 기록해 두고 있다. 조광조(1482∼1519) 선생의 호는 정암으로, 중종 10년(151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14년(1519)에는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를 당해 이곳 능주 지방으로 유배되었으며, 그해 12월 20일에 사약을 받았다. 그는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 선조 대에 와서야 영의정에 추증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훗날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곳곳에 사당이 마련되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이다. 비몸에는 앞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는 글씨를 2줄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선생의 유배내력을 적었다. 머릿돌은 반달 모양으로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키어 있고 뒷면에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를 제작한 시기는 현종 8년(1667) 4월로, 당시 능주목사를 지내던 민여조가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 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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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군청 문화예술과 061-379-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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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정암 조광조 선생이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능성에 귀양을 와 사약을 받았던 곳으로, 조광조 선생을 추모코자 세운 것이 적려유허비이다. 적려란 유배되어 간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 두는 비를 말한다. 이 적려유허비는 능성현 당시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만 갖추었고 귀부도 형상만 다듬었다.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자취를 기록한 비문은 의정부 우찬 겸 성균관제주세자이사 송시열이 짓고 전서는 충청도 관찰사 겸 수군절도사 순찰사 민유중이, 글씨는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썼으며 현종 8년(1667년) 4월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건립하였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유배하러 와서 살았던 초가집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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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관광공사
촬영자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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