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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공식 관광정보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는 20리 안팎이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진린 장군이 5천 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해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침략을 막아냈던 유적이다. 특히, 이곳은 해수로의 요새지로서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고흥 등에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 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은 이때 우선 본영을 건설하고 피난민들을 거두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 안의 민간인도 수만 호에 달해 한산도 시절의 10배나 되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해 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 수교 (왜교)에 침몰한 왜적을 소탕하고, 다시 10월 9일에는 고금도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가 11월 9일에는 함대가 노량을 향하여 출진하여 충무공이 11월 19일(양력으로는 12월 16일) 아침, 54 세를 일기로 순국하여 이곳으로 유해를 88일간 봉안하였다가 그 이듬해 1599년(선조 32년) 2월 11일 정식으로 발인, 고향인 충남 아산의 묘역으로 옮겼다. 아직도 이 터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수장은 장군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이곳에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충무사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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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관광공사
촬영자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 사진입니다.
확인된 정보
한국관광공사 · 2025.03 기준- 휴무
- 연중무휴
- 신용카드
- 없음
- 지정일
- 1963.01.21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 종목
- 사적
- 유산 소개
-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에 이순신이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고, 그 해 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약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가까이에 있던 이곳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힘을 합하게 되었는데, 이후 7개월간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충무사가 있고, 보호하는 절의 의미를 띤 옥천사가 나란히 있다. 충무사는 진린이 꿈에 나타난 관운장을 제사지내어 장병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관왕묘에서 유래한다. 옥천사는 현종 7년(1666)에 처음 지어졌는데, 관왕묘를 보수공사하면서 그 옆에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하기 위해 암자 하나를 지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왕상과 위패·각종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광복 후에는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충무사를 짓고 이충무공을 모시게 되었다. <br/><b>※(묘당도이충무공유적 →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b>
- 수량
- 4,959㎡
- 영업시간
- 09:00~18:00
- 주차
- 가능
- 유모차
- 없음
- 전화
- 061-550-5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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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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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 2025.03 기준-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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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일
- 1963.01.21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 종목
- 사적
- 유산 소개
-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에 이순신이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고, 그 해 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약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가까이에 있던 이곳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힘을 합하게 되었는데, 이후 7개월간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충무사가 있고, 보호하는 절의 의미를 띤 옥천사가 나란히 있다. 충무사는 진린이 꿈에 나타난 관운장을 제사지내어 장병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관왕묘에서 유래한다. 옥천사는 현종 7년(1666)에 처음 지어졌는데, 관왕묘를 보수공사하면서 그 옆에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하기 위해 암자 하나를 지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왕상과 위패·각종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광복 후에는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충무사를 짓고 이충무공을 모시게 되었다. <br/><b>※(묘당도이충무공유적 →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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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59㎡
- 영업시간
- 09: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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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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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음
- 전화
- 061-550-5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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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공식 관광정보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는 20리 안팎이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진린 장군이 5천 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해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침략을 막아냈던 유적이다. 특히, 이곳은 해수로의 요새지로서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고흥 등에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 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은 이때 우선 본영을 건설하고 피난민들을 거두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 안의 민간인도 수만 호에 달해 한산도 시절의 10배나 되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해 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 수교 (왜교)에 침몰한 왜적을 소탕하고, 다시 10월 9일에는 고금도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가 11월 9일에는 함대가 노량을 향하여 출진하여 충무공이 11월 19일(양력으로는 12월 16일) 아침, 54 세를 일기로 순국하여 이곳으로 유해를 88일간 봉안하였다가 그 이듬해 1599년(선조 32년) 2월 11일 정식으로 발인, 고향인 충남 아산의 묘역으로 옮겼다. 아직도 이 터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수장은 장군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이곳에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충무사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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