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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향교 공식 관광정보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보성향교는 1397년(태조 6)에 당시 군수였던 김유양의 주도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관주산 아래 구계동에 창건하였다가 양청산 서쪽으로 옮겼고, 정유재란(1597)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5년(1602)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인 항일유림의거가 열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강점기때는 향교에서 제사를 올릴 때 술을 빚었는데 금주령으로 인해 술을 빚지 못하게 되자 이에 항거하였고, 결국 제사 때 올리는 술에 대해서는 허용을 받아내게 되고 이로 인해 전국의 향교에서 제사때 술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공자와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 학문을 익히는 공간인 명륜당,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을하던 동·서재 등이다. 건물배치는 학문의 공간을 앞에 두고 제사의 공간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인데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형태이다. 이 향교는 조선후기 이후에 세워진것으로 교육제도사와 향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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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들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사진들을 가져온 사진입니다 (7장).
출처 · 한국관광공사
촬영자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 사진입니다.
확인된 정보
한국관광공사 · 2025.03 기준- 휴무
- 연중무휴
- 신용카드
- 없음
- 지정일
- 1985.02.25
- 지정 종목
- 시도유형문화유산
- 유산 소개
-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태조 6년(1397)에 지은 보성향교는 임진왜란(1592) 때까지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산양지』에 의하면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구계동에서 현 위치로 옮겼다가 양청산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정유재란(1597) 때 불타 없어지자 선조 35년(1602)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순조 32년(1832)에 고쳤으며, 그 이후에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있다. 앞쪽에는 학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서재 등이 있어 배움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어 제사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내삼문을 경계로 배움의 공간과 제사공간이 구분되어 있어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태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명륜당은 원래 풍화루였으나 자리를 옮겨 명륜당으로 고쳐서 사용하고 있다. 외삼문은 최근에 지은 것이며, 대부분 건물들은 조선 후기 이후에 지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 수량
- 일곽
- 영업시간
- 상시 개방
- 주차
- 가능
- 유모차
- 없음
- 전화
- 061-853-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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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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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 2025.03 기준- 휴무
- 연중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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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일
- 1985.02.25
- 지정 종목
- 시도유형문화유산
- 유산 소개
-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태조 6년(1397)에 지은 보성향교는 임진왜란(1592) 때까지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산양지』에 의하면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구계동에서 현 위치로 옮겼다가 양청산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정유재란(1597) 때 불타 없어지자 선조 35년(1602)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순조 32년(1832)에 고쳤으며, 그 이후에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있다. 앞쪽에는 학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서재 등이 있어 배움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어 제사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내삼문을 경계로 배움의 공간과 제사공간이 구분되어 있어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태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명륜당은 원래 풍화루였으나 자리를 옮겨 명륜당으로 고쳐서 사용하고 있다. 외삼문은 최근에 지은 것이며, 대부분 건물들은 조선 후기 이후에 지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 수량
- 일곽
- 영업시간
- 상시 개방
- 주차
- 가능
- 유모차
- 없음
- 전화
- 061-853-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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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보성향교는 1397년(태조 6)에 당시 군수였던 김유양의 주도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관주산 아래 구계동에 창건하였다가 양청산 서쪽으로 옮겼고, 정유재란(1597)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5년(1602)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인 항일유림의거가 열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강점기때는 향교에서 제사를 올릴 때 술을 빚었는데 금주령으로 인해 술을 빚지 못하게 되자 이에 항거하였고, 결국 제사 때 올리는 술에 대해서는 허용을 받아내게 되고 이로 인해 전국의 향교에서 제사때 술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공자와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 학문을 익히는 공간인 명륜당,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을하던 동·서재 등이다. 건물배치는 학문의 공간을 앞에 두고 제사의 공간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인데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형태이다. 이 향교는 조선후기 이후에 세워진것으로 교육제도사와 향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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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들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사진들을 가져온 사진입니다 (7장).
출처 · 한국관광공사
촬영자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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