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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이시진 효자각 공식 관광정보
이시진 효자각은 충주시 동량면 마을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뒤쪽 언덕에 그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시진(1578~1633)은 조선 중기 때 효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극진하여 난리를 만나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또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케 하였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이시진의 효행은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1608년(선조 41) 효자문이 세워졌다. 지금은 낮은 담장을 둘러 효자각을 보호하고 있으며 담장 앞에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남향으로 배치된 정려각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기단은 자연석을 낮게 쌓았으며 그 위에 사각주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만들지 않고 창방으로 결구된 주간에만 네 개의 소로를 놓아 주심도리 장형을 받치고 있다. 가구는 양측 대량 상부에 제형 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청을 하였다.
이 사진들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사진들을 가져온 사진입니다 (5장).
출처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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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된 정보
한국관광공사 · 2025.11 기준- 휴무
- 연중무휴
- 지정일
- 2009.05.08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 종목
- 문화유산자료
- 유산 소개
- 이시진(1578~1633)은 조선중기 때 효자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극진하여 난리(임진왜란)를 만나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또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케 하였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하여 몸이 야위어 거의 죽을 번하였다고 한다. 고을에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1608년(선조 41) 정려를 명하여 세워진 효자문이다. ‘完山李時振之閭 萬曆 戊申春 命旌󰡑이라 편액 되어 있다. 남향으로 배치된 정려각의 규모는 정면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기단은 자연석을 낮게 쌓았으며 그 위에 사각주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만들지 않고 창방으로 결구된 주간에만 4개의 소로를 놓아 주심도리 장형을 받치고 있다. 가구는 양측 대량 상부에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청을 하였다. 초석이나 기둥은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며 기와는 보수하였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340면에 幼學 李時振에 대한 이야기가 「時振斷指」라 하여 그림과 함께 전하고 있다. 이시진(李時振 ; 1578~1633)은 본관이 全州, 諡號는 沖軒公, 자는 起夫이다. 李時振의 지극한 효행에 감동한 온 마을 사람들이 연명(連名)으로 글을 만들어 방백에게 전달하고 방백은 다시 임금님께 아뢰어서 1608년 봄(宣祖 41년 萬曆 戊申 春에 정려를 받아 효자문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7권 20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340면에 실려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1617년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있다. 이 책은 72명의 충신과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쓰여 졌다. 편찬 동기는 임진왜란 이후 도의가 문란해지자 국가에서 백성들의 도의를 회복하고자 펴낸 일종의 국민 윤리서이다.
- 수량
- 1동
- 영업시간
- 상시 개방
- 주차
- 불가능
- 전화
- 충주시청 문화예술과 043-850-5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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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 충주시 · 관광지
충주 이시진 효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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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진확인된 정보
한국관광공사 · 2025.11 기준- 휴무
- 연중무휴
- 지정일
- 2009.05.08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 종목
- 문화유산자료
- 유산 소개
- 이시진(1578~1633)은 조선중기 때 효자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극진하여 난리(임진왜란)를 만나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또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케 하였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하여 몸이 야위어 거의 죽을 번하였다고 한다. 고을에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1608년(선조 41) 정려를 명하여 세워진 효자문이다. ‘完山李時振之閭 萬曆 戊申春 命旌󰡑이라 편액 되어 있다. 남향으로 배치된 정려각의 규모는 정면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기단은 자연석을 낮게 쌓았으며 그 위에 사각주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만들지 않고 창방으로 결구된 주간에만 4개의 소로를 놓아 주심도리 장형을 받치고 있다. 가구는 양측 대량 상부에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청을 하였다. 초석이나 기둥은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며 기와는 보수하였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340면에 幼學 李時振에 대한 이야기가 「時振斷指」라 하여 그림과 함께 전하고 있다. 이시진(李時振 ; 1578~1633)은 본관이 全州, 諡號는 沖軒公, 자는 起夫이다. 李時振의 지극한 효행에 감동한 온 마을 사람들이 연명(連名)으로 글을 만들어 방백에게 전달하고 방백은 다시 임금님께 아뢰어서 1608년 봄(宣祖 41년 萬曆 戊申 春에 정려를 받아 효자문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7권 20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340면에 실려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1617년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있다. 이 책은 72명의 충신과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쓰여 졌다. 편찬 동기는 임진왜란 이후 도의가 문란해지자 국가에서 백성들의 도의를 회복하고자 펴낸 일종의 국민 윤리서이다.
- 수량
- 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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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시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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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능
- 전화
- 충주시청 문화예술과 043-850-5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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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이시진 효자각 공식 관광정보
이시진 효자각은 충주시 동량면 마을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뒤쪽 언덕에 그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시진(1578~1633)은 조선 중기 때 효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극진하여 난리를 만나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또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케 하였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이시진의 효행은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1608년(선조 41) 효자문이 세워졌다. 지금은 낮은 담장을 둘러 효자각을 보호하고 있으며 담장 앞에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남향으로 배치된 정려각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기단은 자연석을 낮게 쌓았으며 그 위에 사각주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만들지 않고 창방으로 결구된 주간에만 네 개의 소로를 놓아 주심도리 장형을 받치고 있다. 가구는 양측 대량 상부에 제형 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청을 하였다.
이 사진들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사진들을 가져온 사진입니다 (5장).
출처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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