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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지 공식 관광정보


+1황룡사는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찰로 지금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터만 남아있다. 면적 8,800평 규모에 불국사의 8배나 되는 대형 사찰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황룡사 경내에는 신라 보물 중 하나인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자장대사의 건의로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3년 만에 완성된 신라의 상징물이었다. 현재 구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탑을 지탱해 주었던 중앙 기둥 주춧돌인 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 왕궁 월성의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새로운 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 건립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도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1969년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64개 주춧돌로 된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황룡사지 터 옆에는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 역사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황룡사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있으며 1층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이 전시되어 있다.
- ✓ 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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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관광공사
촬영자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 사진입니다.

확인된 정보
한국관광공사 · 2025.09 기준- 휴무
- 연중무휴
- 지정일
- 1963.01.21
- 시대
- 신라 진흥왕 14년(553)
- 지정 종목
- 사적
- 유산 소개
-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br/><b>※(황룡사지 → 경주 황룡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b>
- 수량
- 390,418㎡
- 영업시간
- 상시 개방
- 주차
- 가능
- 전화
- 054-777-6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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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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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01.21
- 시대
- 신라 진흥왕 14년(553)
- 지정 종목
- 사적
- 유산 소개
-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br/><b>※(황룡사지 → 경주 황룡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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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룡사는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찰로 지금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터만 남아있다. 면적 8,800평 규모에 불국사의 8배나 되는 대형 사찰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황룡사 경내에는 신라 보물 중 하나인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자장대사의 건의로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3년 만에 완성된 신라의 상징물이었다. 현재 구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탑을 지탱해 주었던 중앙 기둥 주춧돌인 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 왕궁 월성의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새로운 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 건립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도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1969년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64개 주춧돌로 된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황룡사지 터 옆에는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 역사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황룡사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있으며 1층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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